독일VS소련을 알아보자

2020. 4. 28. 20:25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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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폴란드 침공








1940년 북유럽,프랑스 침공









1941년 남유럽 전역 침공







 



1941년 6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드디어 히틀러의 결정에 따라 305만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3달안에 소련을 정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하게되는데....







(소련땅을 가로지르며 진격중인 독일 국방군)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목표로 임무를 나눴어.






이 글에선 엄청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선택이 두고두고 격론의 주제로 회자되는 대표적 전투.
키예프 전투(Battle of Kiev)
(1941년 8월 23일 - 9월 26일) 를 다뤄볼려한다.








 


(황색지역 1941년 7월까지 분홍색지역 9월1일까지 보라색지역 9월 9일까지 독일군 진격로, 빨간점이 키예프다)


키예프는 후방으로 향한 통로가 8월까진 개방되어 있었지만 9월부턴 사방이 독일에게 둘러쌓여진 고립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절망적인 이 도시를 절대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키예프의 함락은 식량곳간인 남부 러시아로 향하는 거대한 대문을 열어놓는 모양새가 되므로 당장 방어에 불리한 형태였음에도 어떻게든 이곳을 지키려 하였던 것이지.

스탈린의 명령으로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는많은 소련군이 한 곳에 집결된 것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어.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대로 그냥 전진하기가 애매해진 것은 당연하고... 물론 제일 좋은방법은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을 격멸하고






(코카서스 지역. 저기에 소련이 기름을뽑아먹을수있는 유전지대가있음)


(돈 강과 로스토프. 코카서스지역으로 가는 관문임)

그와 동시에 코카서스지역의 출입구라 할 수 있는 돈 강 하구의 로스토프까지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불가능에 가까웠지. 

이처럼 독일군은 키예프를 고립시켜두고 계속 전진하느냐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점령이냐는 고민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했는데 결국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남부집단군의 고민을 풀기 위해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가 나서게 되었어.

전진,키예프점령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면 예비대가 투입해야했는데,

전쟁개시 두 달이 경과하면서 독일군의 소모가 커지자 전 전선에서 너나없이 예비대보충을 요구하던 상황이라 남부집단군에게만 지원을 하기 어려워 전선 전체를 관할하는 OKH도 쉽게 해법을 내놓기는 어려웠고 이곳에서도 심각한 갑론을박이 오고 갔던중이었어





하지만 그때 히틀러가 끼어들게 되는데

그는 남부집단군 소속의 제6,17군과 제1기갑군이

키예프를 점령하고 제11군은

돈 강을 향해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추축국에 가입했었던 루마니아)


루마니아 제3군이 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간격을 메우고,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 같은 남부 도시들을 집중 공략하는데 진력하라고 하였어.

하지만 히틀러도 이렇게 남부집단군을 분리하면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을 일거에 소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바로 여기서 그는 바바로사 작전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모스크바와 불과 400km거리밖에 두고있지 않은 스몰렌스크. 전남 진도에서 강원도 철원까지의 거리밖에안난다)

히틀러는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모스크바를 향한 다음 진격을 한창 준비 중이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우측 선봉인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2기갑군을 90도 남쪽으로 꺾어서

키예프로 남하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여기에 더해 폰 바익스 장군의 제2군(보병)도 함께 동행하라고 명령하였어.

히틀러는 제2기갑군이 북쪽에서, 남부집단군의 송곳인 클라이스트 장군의 제1기갑군이 남쪽에서 키예프 후방인 동쪽으로 동시에 돌격하여 거대한 봉쇄망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국방군의 영웅, 전차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여기서 OKH 수뇌부들과 제2기갑군의 지휘관인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기회를 잡았을때 빠르게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쳐야된다고 주장하면서 극도로 반대를하였는데 

그럼에도 히틀러가 이런 결심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소련군의 붕괴가 빠르다는 점이었는데,

그 동안 바르바로사 작전의 주공을 중부집단군에 두고 있었지만 중부집단군의 주요목표중 하나였던 대도시 민스크와 스몰렌스크에서의 연이은 대승으로 인하여 소련군이 심하게 붕괴되었으므로 중부집단군 전력 일부를 남부집단군 지역으로 돌려도 모스크바 점령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지.

결국 구데리안장군은 국가 최고 지도자인 히틀러의 명령에 굴복하고





 

 


(남하하는 독일 제2기갑군의 전차들과 기갑군 소속 보병들)



1941년 8월 17일, 제2기갑군은 모스크바공방전을 눈앞에 놔두고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남하를 개시하였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를 지척에 두고 진격로가 바뀌어 불만이 매우 많았지만 명령에 따라 제2기갑군을 이끌고 500km를 남하하였다.

독일군의 이동을 뒤늦게 포착한  STAVKA(스타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는 키예프 북쪽에 포진한 브리얀스크 전선군을 이동시켰지만 한발 늦었지.

구데리안은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소련 전선군을 차례대로 분쇄하며 진출하였다.






  (빨간점은 로크흐비스챠마을. 키예프 전면과 남부는 남부집단군의 제6군과 17군이 둘러싸고있다.)

9월 16일 키예프에서 193km떨어진 로크흐비스챠라는 마을에서 남부집단군 소속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이랑 만나게 돼. 이제 키예프는 완전히 배후가 차단되었지.










(재배치중인 독일 국방군)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중부집단군의 2군이 합세하여 키예프를 향해 진격을 하게되는데  






(북부 동부 2기갑군,2군, 남부 서부 남동부 1기갑군,6군,17군 포진)



드디어 독일 국방군 도합 50만명과 소련 붉은군대 80만명이 대격전을 치루는 키예프 전투가 시작이돼.


체계적으로 3개의 기갑군과 3개의 보병군이 만든 포위망을 줄이기 시작했고 







(불타는 키예프 시내)

보병,포병,전차,항공기들간의 격렬한 전투는 포위전 내내 계속되었어 
 

소련군은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역부족. 도대체 어느 곳부터 막아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키예프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었다.




(폭격중인 독일 하인켈 폭격기)


(남쪽에 위치한 제6군의 전투부대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키예프 시내로 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인 독일군 공병대)
 

포위망에 갇히게 된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로포노스는 계속 키예프에서 항전하다가는 회복불가능의 참담한 패배가 예상되어서 후퇴를 건의하였고,

신임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도 여기에 동조하였지.

하지만 당연한 주장에 사이드브레이크 콱 걸어버리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스탈린...  무슨 일이 있어도 키예프를 사수하라고 재차 엄명을 내렸어.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만에서의 패배도 바로 이러한 스탈린의 개입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는데  그 동안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어느 정도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던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 부됸니장군도 퇴각을 주장하였는데 9월 13일 그 마저 해임시킨 장본인.

해임시키고 기껏 새로운 사령관으로 등용한 인물이 바로 직전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참패한 티모셴코장군이었다. 






(왼쪽이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 개천 초에 영리하게 지연전을 펼쳤던 인물이었는데 스탈린때문에  후퇴시기를 놓쳤고 결국 전사함. 

오른쪽은 신임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한 티모셴코. 1940년 핀란드 침공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거의 피로스의 승리라서 대단한 전과라고 보기는 힘듬.

오히려 바로 직전에 있었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였던 인물이다.)


이제 소련 군부에서 스탈린에게 간청할 사람은 없어졌다.

오히려 스탈린은 자신이 임명한 샤포슈니코프장군이나 티모셴코장군을 제치고 신임참모장이었던 키르포노스장군에게 연락하여 절대로 자신의 허락 없이 키예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엄명했어.

그때만 하더라도 흡혈귀 스탈린은 자신을 전쟁의 신으로 착각하고 있었겠지ㅋㅋ 이제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의미 없는 사수였다.

소련의 신임 키예프 특별관구 사령관 티모셴코장군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저항을 지시하였다만 결국 3일 만에 키예프에 고립된 남서전선군에게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이나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거지.





(후방에서 소련이 포위망을 뚫고나올것을 대비해 대기중인 2기갑군의 예비대 일부)

 

그런데 여기서 웃긴점은 키르포노스장군이 공식 문서로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구두 명령만으로 절대로 부대를 움직일 수 없다고 강력히 면전에대고 말했지.

왜 그런가하면  민스크에서 부대를 철수시켰다가 스탈린을 격노를 사서 사형당한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장군의 비참한 최후를 잘 알고 있었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르포노스장군의 추후 스탈린이 책임을 물을 때 티모셴코장군의 탓으로 돌릴수있도록 구두 명령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거다






(파란선이 프셀 강)



결국 9월 19일 전전긍긍하며 스탈린의 눈치를 보았던  소련군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는 키예프는 포기하되,

프셀 강까지만 퇴각을 허락하는 공식 명령을 하달하였다.

키르포노스장군이 예하 부대에게 키예프의 뒷구녕인 동쪽으로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오히려 퇴각 명령이 하달되자 소련 남서전선군은 예하 부대들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 상실해서 사방팔구 탈영하고있고 혼자서 밀대밭들가서 숨어있고 이지랄이 나버렸다.



(도망치다 키예프 외곽에서 걸려 항복하는 소련군)


중구난방으로 갈가리 쪼개진 소련군들은 포위망 안에서 가볍게 각개 격파되는 운명을 맞이하였고 잘싸워준 소련의 키르포노스 장군은 키예프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오직 10만명의 소련군만 탈출에 성공지.

독일 구데리안장군의 2기갑군이 남하한지 약 1개월만의 일이다. 






(키예프의 독일군)
 

키예프 전투는 결국 1941년 9월 26일 독일국방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투로인해 소련군 제5, 21, 26, 37군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고 제38, 40군 또한 재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신창이가 되었어....

20여 만의 소련군이 전사하였고 50여 만의 소련군이 독일의 포로가 되는 엄청난 패배를 당하면서 소련 키예프 특별관구는 완전히 붕괴되었지.

(독일은50만명 투입 13만명 사상) 이건 제2차 대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상 단일 전투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과였다

내생각에는 명령을 확실하게 내려준 히틀러와 독일 지휘관들이 유능함이 한턱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작전을 반대하던 구데리안조차 환호하였을 정도였고.








 

 앞서 벌어진 우만 전투를 포함하여 두 달 동안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무려 100만 명의 소련군이 궤멸되면서 동부전선의 남부는 순식간 힘의 공백 지대가 되었다고한다.

사실 이 정도 타격을 입었다면 어지간한 나라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을 것인데  소련은 인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고 독일은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






 


(포로가 된 소련군)



침공 이후 이 전투가 종결된 1941년 9월말까지 독일은 무려 400여 만의 소련군과 그에 해당하는 군비를 붕괴시켰고  북부 발트해에서 남부의 흑해에 이르는 1,700킬로미터의 전선을 구축하여 서부러시아를 완전히 독일의 군화발아래 굴복시켰다.

이제 독일은 얼마 남지 않은 소련의 목숨을 거두면 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과연???. 적어도 이 시점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키예프 공방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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