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6. 18:44ㆍ정보
조선인들의 소문난 음주벽
처음 맛 본 맥주맛
1875년 8월
영국 전함 한 척이 거문도를 방문했다.
이때 함선의 영국인 선장은
거문도의 촌장을 초청해 함선을 구경시켜 주었다.
초청을 받은 촌로는 감사의 표시로
막걸리를 가지고 왔다.
영국인들도 보답의 표시로
맥주 한 통을 방문객들에게 제공했는데,
하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오랜 항해를 마친 맥주는
이미 김이 빠져 있었고
알콜 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이거 원 오줌도 아니고.."
"코쟁이들은
이딴 걸 술이라고 마시나.."
때문에 맥주를 마시던 조선인들의 표정은
매우 근엄했다고 한다.
다만 항상 이렇게
김빠진 맥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85년 영국인들은
제물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한 주막에
잠시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때 영국인들은 가지고 있던 독일산 맥주를
주막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들에게도 나눠줬다.
"웩!"
하고 한 사람이
역겨운 표정으로 뱉어냈을 뿐
나머지 조선인들은
모두 맥주 맛에 호의적이었다.
"쌉쌀하게 톡 쏘는게
묘한 맛이 있구만."
술고래 평양사람들
오늘날 한국인들의 음주문화는
명성이 자자하지만
구한말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인들은, 술에 만취해 길거리에 드러누운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수시로 남기고 있다.
한 영국인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왜 이렇게 술에 취해
자빠진 사람들이 많은가?"
"조선인들은 체질적으로
술에 약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꿨다.
"조선인들은 엄청난 술고래다."
"스카치 위스키 정도는
한 병을 마시고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독한 조선의 술(소주)을
벌컥 벌컥 들이키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그토록
길거리에서 퍼질렀던 것이다."
다른 서양인은
조선의 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막걸리 : 버터 밀크처럼 부드럽고 한얀 술
소주 : 강한 냄새와 얼얼한 맛을 지닌 순백색의 알콜
당시 소주는 도수가 매우 강해(40도)
일반적으로 한양 사람들보다는,
주로 추운 북부지방,
특히 평양지역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과도한 음주 습관 때문에
폭행사건도 잦았고,
심지어 살인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데..
1900년 8월에 한 영국인이
술 취한 평양시민에게 맞아 죽었던 일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평양에 거주하던
미국인 공사 알렌은
조선 정부에
이런 요구를 하기도 했다.
알렌
"평양사람들은
너무 술을 자주 마십니다."
알렌
"때문에 사건, 사고가
유독 많이 발생합니다."
알렌
"평양 주변 일대를 금주지역으로 선포하던지.
아니면 소주 판매를 금지하던지 했으면 합니다."
또 알레은 평양 사람을 이렇게 혹평했다.
알렌
"평양 사람들의 인생의 목적은.."
알렌
"오직 돈을 많이 벌어
실컷 소주를 마시는 일인듯 싶다."
술 취한 행동으로 목숨이 날아갈 뻔
1898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국 공사인 존 조단과 미국인 선교사가
덕수궁 주변을 걸어가는데
도중에 시위대 소속의
한 군인과 마주쳤다.
이 군인은 술에 만취해
기분이 잔뜩 들떠 있었고
두 명의 외국인을 만나자
인사를 하고 싶었다.
조선 군인
"어이! 코쟁이 안녕들 하냐?"
이러면서 공사의 목을 세게 쳤다.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이 조선인의 선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와떠뻑. 이 자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우리를 쳤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한 서양인들은
결국 관아로 조선 군인을 데리고 갔다.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인과의 사소한 마찰도
크게 두려워하고 있던 터였다.
때문에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외무대신은 조단 공사에게 즉시 사과했고
조선 군인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이 지나친 판결에
오히려 조단 공사가 깜짝 놀랬다.
"헐! 무슨 그런 일로 사형을 집행함?
말도 안 됩니다."
"자비를 베푸세요!"
이렇게 조선 정부에 요청했고
그 불쌍한 군인은 10년 유배형을 선고 받게 된다.
● 서양인의 석전 관림기
조선 최고의 인기 스포츠, 석전
삼국시대부터 내려져온
우리 전통 민속놀이가 있다.
바로 석전,
즉 돌싸움이다.
그런데 이런 돌싸움은
서양인들이 보기에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만 해도 석전은 서울 사대문 밖 공터에서
매년 2차례 걸쳐 치러졌다.
석전은 주로
마을 대항전으로 치러졌지만,
간혹 '원한관계'가 있는 상대를 때려주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석전은 국가에서도
'상무정신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으니
석전을 통해 부상, 사망 사건이 발생해도
크게 문제 삼거나 하지 않았다.
포졸들이 현장에
배치되었지만,
어디까지나 구경꾼들이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싸움 방식은 대략 이러했다.
먼저, 두 팀은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마주한다.
이때 전투원들은
돌과 몽동이를 지참하고
볏짚으로 만든 갑옷, 나무방패,
투구로 사용되는 새끼줄 모자로 무장한다.
새끼줄을 똬서 만든 일종의 헬멧
투석꾼들이 맨 앞줄에 서고
몽둥이를 든 장정들은 둘째 줄에 서서 대오를 구성한다.
그리고 나면,
양측의 선수 대표가 나와
각각 상대를 비방하며 욕설을 한다.
그러면 관중들도 크게 환호를 한다.
석전 구경꾼들과 선수들
그리고 경기 시작과 동시에
돌들이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진다.
전투는 보통 여러 시간 동안 지속되고,
마을 공터 곳곳에서 벌어진다.
때문에 너무 가까이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도망가야 했다.
이때 구경꾼들은 우르르 도망가다가
인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보통 경기는
한 팀이 도망가면 끝이 난다.
석전의 승리자들은
아이들에게는 존경하는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패배자들은 울분을 삼키며
6개월 후의 경기에서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경기 결과는
왕실에까지 신속하게 전해진다.
그러나 석전이 끝나면
뼈가 부러지거나 코가 망가지거나
이빨이 조각나고, 온몸이 타박상을 입는 등
부상당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중에 사망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처벌받지는 않았다.
경기는 경기일 뿐이었다.
아이들의 석전
어른들만 석전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석전도 따로 있었다.
아이들의 석전은
주로 개천가에서 이뤄졌는데
이때도 구경꾼들은 몰려들어
내기 돈이 걸리는가 하면,
아이들을 격려하기도 하는 등
마치 오늘날 유소년 축구 경기를 방불케 했다.
어떤 어머니는 8살 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석전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석전도
여러 시간 계속되었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승리한 아이들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가족으로부터 잘 했다고
칭찬도 받고, 선물도 받았다.
1905년에 발행된 미국 잡지에서는
조선의 석전을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미국 주민들이
자기 고장 소속 야구 선수들을 자랑스러워하듯,"
"조선 사람들도 자기 마을의
투석꾼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잡지에서는 지역별 석전 중에서
평양을 첫 손가락으로 꼽았는데,
"평양은 가장 정교한 투석가들이 모인 곳"
이렇게 평하고 있다.
자전거를 처음 본 조선인들
마냥 신기했던 자전거
자전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 조약 이후
서양인의 도래와 함께,
여러 서구 문물이 유입될 때에 같이 소개된다.
그리고 1884년 12월 4일,
한양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했고
정국은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 체류 중인
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으로 해군을 급파했다.
이때 파견된 해군 중에서는
랜스데일 대위도 있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자전거를 타고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가게된다.
그때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인들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자, 모두들 대단히 신기해했다."
"특히 한양에 도착하자
구경 나온 사람들로 일대 장사진을 쳤다."
"사람들은 자전거가 지나갈 때마다
놀라 입을 벌린 채 뒤로 물러섰다."
"헐, 어떻게 바퀴만 있는데
사람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자전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서로 팔짱을 끼고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런 호기심은
고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종
"자전거를 지탱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쓰러지지 않는지 대단하다."
이에 랜스데일은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자전거 타는법을
직접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의 도움으로 고종은 자전거를 잘 타게 되었고
이후 몇대의 자전거를 미국에서 주문했다.
자전거의 보급
자전거는 곧 제물포와 서울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자전거에 대한 수요도 점차 증가했다.
알렌은 1896년 당시
서울에 총 14대의 자전거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구한말 당시 자전거는
한양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하지만 시골에서는
여전히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어느날 알렌이 교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한 노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노인은 잠시 멈춰 서더니 알렌이 타고 있던
이상하게 생긴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증기기관차라는 거임?"
노인은 자전거를 당시 막 개통된
서울-제물포 사이의 기차로 생각한 것이다.
당시 자전거는 희귀했던 만큼
귀중품으로 간주되었는데
덩달아 도적들에게도 좋은 표적이 되었다.
(당시 한양에는 좀도둑이 많았다.)
도둑들이 자전거의 부속품들을 훔쳐
다시 판매하는 일이 발생했고,
대담한 도둑은
한 조정대신의 자전거를 훔치다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적도 있었다.
한편 당시 서양인들 사이에서
자전거로 시간을 재며 경주하는 것이 인기였는데
1897년 4월 15일자 영자 신문에는
평양의 그레이엄 리 목사가
개성 ~ 한양까지를
6시간에 주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5월 25일신문에서는 제물포 ~ 한양 남대문까지
2시간 56분에 주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로 사정도 안 좋은데,
중간에 타이어 펑크도 없이
그 먼 길을
주파했다는게 더 놀랍다.
최초의 자동차
조선인들은 자동차를 처음 보고
어떤 반응을 했을까?
1909년 2월 20일자
영국의 그래픽지의 기사는 이렇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자동차를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고
들고 가던 짐도 팽개친 채 숨기에 바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쇳덩이 괴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였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놀라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 들었다.
솔직히 정말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과장이 심하지만,
자동차를 첫 대면한 조선인들이
쇳덩이에 뒤덮여,
굉음을 내며 활보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자동차는 서양인들에게도
무척이나 비쌌기 때문에
광산업자 같은 졸부들 아니면
쉽게 몰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좁고 열악한 도로 사정도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에 장애가 되었으니,
1918년 시골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서
서울까지 자동차로 여행한 서양인 선교사는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서울로 가는 길에
21번이나 타이어가 터져 펑크가 났는데,"
"서울 부근까지 왔을 때에는
결국 바퀴 전체가 굴러 빠지더라."
초창기 자동차들은
상태도 좋지 못했기 때문에 수시로 고장 났고
이런 고장난 차들을
가끔 달구지를 동원해서 끌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보면서
이렇게 조롱하곤 했다.
"이게 그 자동차라는 거야?
뭔 소달구지보다 못하냐? ㅋㅋ"
그런 자동차는 1920년대 이후
차츰 길이 닦여지면서 보급이 되게 되는데
1930년대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1930년대 평안북도 대유동에 위치한
프랑스 금광에
간혹 일본인 관리들이 방문했는데
이들은 크고 검은 값비싼 차를 타고 오곤 했다.
때문에 인근의 아이들은
이 진기한 차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지만,
대부분은 멀리서 바라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조그만 아이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몰래 들어와, 호기심에
반질반질한 차의 표면을 만졌는데..
그만 '바지지직~' 전기에 감전되어
화들짝 놀랐다.
일본인들은 아이들이 차를 만지지 못하게
표면에 전기를 연결시켜 둔 것이었다.
전기를 둘러싼 소동
실수로 미국인을 죽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발전기는 1886년 12월,
미국 출신의 윌리엄 매케이가 도입한 것이다.
매케이는 기술자로 초빙된 뒤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고
도착 즉시 발전기를 저장할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7년 3월 8일
불행이 찾아왔다.
경북궁에 전기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매케이를 호위하던 조선의 한 젊은 군인이
그의 권총을 살펴보다가
그만 변고를 내고 만 것이다.
"와! 총이 이렇게 작을 수도 있나?
거참 신기하네."
"어디 한번 당겨볼까?"
그랬는데,
탕!
하필 총알이
매케이의 가슴으로 격발이 된 것이다.
매케이는 곧장 알렌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방도가 없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6시에 목숨을 잃고 마는데
매케이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실수로 그런 것이니,
그 친구를 처벌하지 말도록 해주세요.."
물론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었고,
다른 미국인들도 사건을 목격했기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간섭과 공세를 두려워하던 조정은
해당 군인을 본보기로 간주하고 즉시 체포했다.
그리고 군인은 감옥에서 호되게 매를 맞고
사형을 언도 받게 된다.
하지만 소식을 듣고 매케이 부인이 자진해서
군인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애원했다.
"남편의 마지막 유언이 그러하니,
제발 선처를 베풀어주세요."
그렇게 매케이 부인의 청원으로 인해
조선 군인은 형 집행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부인의 성품에 감동을 받아
500 달러의 위로금을 제공하고
(당시 조선 노동자들의 1년치 연봉이 30달러였다)
고종
이들이 조선에 남기를 원할 경우,
평생 주택과 아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매케이 부인은 제안을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귀신이 발전기를 멈췄다.
1894년 5월이 되어서야
다시 발전기는 설치된다.
이때 설치를 맡은 것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였는데,
이때 파견 나온 미국인 기술자는
궁궐에 전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고종과 체결하면서,
공급 대금을
조선 왕실에서 받기로 했다.
하지만 전기 공사는
계약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악명 높은
관료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부패한 관리들은 대금을 지급할 시기가 다가오자
암암리에 뇌물을 요구했고,
뇌물을 지급할 때까지
대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미국인 기술자는
대금을 받아내기 위해 기막힌 꼼수를 쓰게 되는데,
"고종 황제가 평소 암살이 두려워
훤하게 불을 키고 잔다지?"
"그래 이거야!
이걸 이용해 보는거다!"
어느날 그는 발전기를 연결하는
나사를 빼버렸다.
고종은 그날 저녁 어둠이 내렸는데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다급해진 고종은 기술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미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아직 대금을 받지 못한 탓에
귀신이 발전기를 멈춘 것 같습니다."
"그 귀신은 돈을 받을 때까지
일을 하지 않을 듯 하옵니다."
그러자 고종은 노발대발했다.
고종
"아니, 왜 신료들은
아직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어?"
고종
"지금 당장 지급해.
아니면 대신들의 목을 칠테다."
이렇게 엄포를 놓고나서야
대금은 지급되었으니,
미국인은 대금을 받자마자
다시 발전기를 돌렸고 이렇게 말했다.
"전기 귀신들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전차의 도입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실제 전기는 일반 사람의 생활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불편만 끼쳐
얄밉기까지 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논과 밭을 가로질러 제멋대로 설치된
전봇대와 전깃줄은 성가신 것이었고
전봇대로 쓰일 나무의 공출과
이를 세우기 위한 부역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에라이 잡것."
"이놈을 세운다고
내 논마지기만 다 망쳤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미신 신봉이 컸던 탓에
전기의 도입에 크게 반대하고 나섰다.
1898년 전기를 처음
서울에 도입했을 때
사람들은 전기줄이 귀신을 화나게 할거라고
걱정을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극심한 가뭄을 두고
전깃줄을 탓하기도 했다.
"하늘에 저렇게 전깃줄을 쳤으니
하느님이 노해서 비가 오지 않는 것임."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전기의 유익함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전차의 도입이 주요했다.
1898년 개통된 전차는
그야말로 근대화의 상징으로 각광 받았다.
고종
"전차는 폭풍 속에서도 달리지,
그러면서 빠르지. 이 얼마나 좋은가!"
당시 전차는 한양에서만
3개의 노선이 있었는데,
개통 당시 전차의 인기는 매우 높아서
하루 평균 승차인원은 약 2천명으로
당시 서울 시민의 1%를
차지할 정도였다.
전차를 타기 위해 생업까지 쉬거나
한번 타면 내리지 않고,
종점과 종점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전차를 타러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차를 타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전차는
마냥 환영받지만은 못했다.
전차가 개통된 지 1주일만에
어린이가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전차 운전사인 일본인은
사고를 수습하지 않고 줄행랑을 친 바람에
군중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전차 2대를 불태워버렸다.
또 전차의 등장으로,
생계에 타격을 입은 인력거꾼들이
조직적으로 전차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했으니,
실제로 전차가 개통된 지
4~5년이 지난 후에는
실용적인 운송 수단이라기보다는
흥미롭고 신기한 오락기구의 용도가 더 컸다.
-전기단두대 사건-
당시 한양 사람들은
여름 밤이 되면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야외에서
잠을 청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전차노선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간혹 철로를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했다.
철로는 조선시대의 베개와
크기와 형태가 유사했기 때문이다.
미국 공사 알렌도 이렇게 말했다.
알렌
"철로와 토마토 깡통은,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베개 대신 사용하기에 아주 좋은 물건이다."
더군다나 철로의 냉기는
한 여름 밤 무더운 몸을 더욱 식혀줬다.
"이거 베고 자면
더위가 확 가시더라."
1901년 여름 서울을 방문한 한 미국인은
당시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은 차갑지만
안락한 철로에 목을 베고.."
"하얀 옷을 입은 채 길게 누워
멀리서 보면 마치 유령들의 행렬 같았다."
그런데 어느날
끔찍한 참변이 발생했다.
야간전차 시간은, 원래 오후 11시 30분에서 출발해
12시에 종착역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철로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전차의 운행 시간을 잘 알고 있어
막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돗자리를 깔고
철로에 목을 베고 누워
찬 밤공기를 즐기곤 했다.
그런데 1901년 8월
어느날이었다.
이날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막차의 출발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평소 철로에서
잠을 청하던 사람들은
전차가 늦게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평소처럼 철로를 베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당시 기관사는 밤이 깊었고
시간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탈 사람도 없다고 여겨
전차가 오는 것을 알리는 종을 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관사는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평소보다 빨리 운전했다.
그랬는데,
뒤늦게 철로에 누운 두 사람을 보고
급히 종을 울리며 전차를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결국 이들을 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마치 '단두대'에서 처럼
목이 잘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여들었고
곧 크게 분노했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일이 있나!"
"당장 이 살인기계를 부숩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관사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전차는 곧 불에 타고
파괴되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한성전기회사는
철로가 회사의 사유재산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도시 전역의 전봇대에 붙이며
대응하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붙이는 소년-
하지만 이를 접한 사람들은
전단지를 거칠게 찢어 버리고 화를 냈다.
"여기 땅이 다 니들꺼냐?"
"앞으로도 계속 철로를 베고 잘거니깐
어디 알아서 해보라고."
"이참에 전차를
모조리 불태워버리던지 해야지"
라며 다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며칠 동안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결국에는 한성전기회사가 굴복하면서 종식됐다.
이후로도 한양 사람들은 강철 위에 목을 베고
밤공기를 계속 즐겼던 것은 물론이다.
대신 한성전기회사는
전차의 운행 일정을 일부 변경해야 했다.
특히 야간전차는
반드시 일정에 따라 운영하도록 했다.
만약 출발이 지연되거나 기계가 고장날 경우,
다음날 아침까지 운행을 연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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