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식인을 했던 이야기
2020. 4. 21. 19:22ㆍ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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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사람이 아사 직전의
극한 상황에 몰린다면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식인(cannibalism)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 방법이야
물론 그 선택은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이나 의심할 바 없는
엄청난 비극이지
맥퀴리 하버 탈출 사건
(macquarie harbour)
1820년대 초, 영국의 감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국 정부는 좀도둑부터
살인마까지 다양한 죄질의 범죄자들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 남부 해안의 섬,
타스메니아(Tasmania)로 이동시켰어
TASMANIA 섬에서도
몇 가지 구역을 나눠서
특히 살인과 같이
죄질이 나쁜 죄수들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시킨
맥쿼리 하버로 보내져
수년간 고된 노역을 해야 했다고해
이곳에서의 노역 생활은 악명이 자자했는데
죄수들은 차라리 교수형 당하는 것이
낫다 생각할 정도였어
일은 힘들고 예민해진 동료 죄수들끼리
죽이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
생지옥이 따로 없었지
1822년 9월,
공동 작업에 동원된 8명의 죄수들은
고된 노역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간수를 뒤에서 덮친 후
나무에 묶고 약간의 식량과
도끼 하나만을 들고 도주하지
탈출한 8명은 배를 훔쳐서
아시아 쪽이나 남미로 가려고 했지만
탈출 사실은 바로 들통나면서
간수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가 폐쇄당하고 말아
죄수들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 숲이 울창한
미개척지를 지나 육지로 탈출을 감행한다
육지로의 탈출을 감행한 죄수들은
여태 꽤 있었지만
그중 단 한 번도 탈옥에 성공하지 못했다고해
그들이 가려는 가파른 산맥에는
먹을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다른 방안은 없었어
8명의 죄수 중
로버트 그린힐이란 죄수가
무리의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었어
그린힐은 선원 출신이었어서
태양과 별로 방향을 가늠할 줄 알았고
유일한 무기였던 도끼를 가지고 있던 자였지
탈출을 감행한지 8일째
그들은 완전히 기아 상태가 되었어
앞서가던 5명의 죄수들은
체력이 약해서 자꾸 뒤처지기만 하던
3명을 귀찮게 여겼고
결국 무리는
강한 쪽과 약한 쪽 2 무리로 나뉘게 돼
리더인 그린힐과 그의 친구였던
트레버스, 보든햄, 매더스, 피어스가
한 무리를 이뤘고
달튼, 캐널리, 브라운이
또 다른 한 무리를 이루었지
밤이 되자 두 무리가 따로 잠을 청했어
그때 리더인 그린힐이
자신의 무리에게 제안을 한다
선원이었던 그린힐은 선원의 관습을
예로 들며 얘기를 꺼냈지
선원들의 관습이란 생존이 어려울 시
최후의 수단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선택된 한 명을 먹고
나머지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였어
절박했던 그린힐의 무리는 전원이 찬성한다.
그들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는 대신 약한 3명의 무리에서
달튼을 희생자로 골랐어
선택의 이유는 죄수 캠프에서
달튼이 규율을 어긴 동료 죄수들을
간수 대신 채찍질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약한 무리의 3명이 모두 잠들자
그린힐은 달튼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친다
죽은 달튼의 시체는
농부 출신인 트레버스가
양을 도살해본 경험으로 손질했지
다들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날 밤 달튼의 살점을 먹은 사람은
그린힐과 트레버스뿐이었어
하지만 아침이 되자
고기 냄새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죄수들도
달튼의 살점을 먹었어
배를 채운 죄수들은 힘을 얻고
다시 걷기 시작했어
죽은 달튼과 같은 무리였던
브라운과 케널리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앞의 5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다시 맥쿼리 하버로 돌아갔어
다음 희생자는 자신들이 될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린힐의 무리는 한참 후에야
2명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생존 게임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5명의 죄수들은 한 번의 살인으로
무리 중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되리란 걸 알게 됐지
5일 후 고기가 바닥나자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고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결국 제비뽑기를 했고
당첨자는 보든햄이 됐음
보든 햄은 그 즉시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그의 살로 굶주린 배를 채웠지
이제 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다
4명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를 가진
그린힐과 그의 친구 트레버스가
무리 중 우위였고
나머지 매더스와 피어스가 약자였지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이
다시 그들을 덮쳤고 어느덧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매더스는
피어스에게 둘이서 그린힐과 트레버스를 덮쳐
도끼를 빼앗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피어스는 강한 쪽을 선택하고
피어스의 배신으로 매더스는
그들의 식사 거리가 되었지
이제 친구 사이인 그린힐과 트레버스,
외톨이인 피어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남게 된다
누가 봐도 다음 차례는 피어스였지
트레버스에게 불행한 사고가
닥치기 전까진 말이야
숲에서 트레버스가
독사에 발목을 물린 거야
그린힐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트래버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물린 부위는 썩기 시작했지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트레버스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고
결국 다음 희생자가 됐어
마침내 두 명만 남게 되었어
그린힐과 피어스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어
둘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그게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겠지
때문에 둘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이제 누가 오랫동안 안 자고
버티냐의 싸움이 시작됐어
그들은 삼일 밤낮을
꼬박 새운 채로 계속 걸었다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견디는 수밖에 없었지
4일째가 되던 오후
결국 잠이 든 쪽은 그린힐이었어
그린힐이 잠들자 피어스는
곧바로 도끼를 집어 들고
그의 머리를 쳐버렸지
이로써 알렌산더 피어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피어스는 그린힐의 고기를 먹고
일주일을 더 걸어
탈출 50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어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
허망하게도 대기하고 있던
간수에게 잡혀 심문을 받아..
피어스에게 숲에서 일어난
식인에 대해 들은 간수들은
처음엔 이를 믿지 않았어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식인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간수들은 피어스가 나머지 죄수들이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곧 사실임이 드러났고
1824년 7월 19일
알렉산더 피어스는 탈출,
식인 행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미뇨넷호 난파 사건 (mignonette ship)
1884년 여름 미뇨넷호
4명의 선원들은 요트 한 척을
본국인 영국에서
호주의 새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어
미뇨넷호에는 경험 많은 경주용 요트 조타수인 선장 탐 더들리랑 역시 경험 풍부한 선원 네드 브룩스
항해 담당 에드윈 스티븐스,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잔심부름꾼 리처드 파커가 승선해있었지
미뇨넷호는 14년 전에 만들어진 꽤나 오래된 배였고 상태는 아주 개판이었어
19세기에는 배들이 부실했기에 선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직업이었다
미뇨넷호가 침몰한 1884년만 해도 550여 척의 영국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항해를 시작한 지 7일 후인 7월 2일, 거센 풍랑을 만나자 미뇨넷호는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침몰해버렸다
더글리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무사히 소형 보트에 옮겨탔지만 그대로 대서양을 표류하게 됐고
가지고 있던 것은 통조림 2개, 나이프 하나, 경도 측정 시계뿐 마실 물조차 없었다
배가 난파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세인트 헬레나'와 '트리스탄 드 코나'라는 곳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 1200km 지점에 있었고 희망봉은 동쪽으로 2600km, 남미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희망봉을 지나는 배들의 항로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지
표류한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심한 갈증이 찾아왔어
통조림이랑 빗물, 바다거북 따위로 잠깐 동안은 이를 견뎠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나니까
그들은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했지
표류한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항해가 처음이었던 파커는 목마름에 바닷물이라도 마시려 했어
선장인 더글리는 바닷물이 탈수증을 초래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를 저지했지
더글리는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선원 관습에 따라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골라 인육이라도 먹어야 될 거라고 생각해
이를 선원들에게 말했고 다들 망설이는데 브룩스가 격하게 반발했어
결정은 유보되었고 표류한 지 3주가량이 지난 7월 20일 밤
파커는 갈증을 못 참고 바닷물을 마시게 되지
아침에 잠에서 깬 동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커를 보게 되고
파커가 죽으면 혈액이 응고돼서 마실 피가 없어질 거라 판단한 선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반발하던 브룩스에게 더글리는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설득시켰다
파커만 빼고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거든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더들리가 파커의 목을 찌르고 그 피를 통에 담았지
더들리와 스티븐스, 맹렬히 반발하던 브룩스도 갈증을 못 이기고 파커의 피를 허겁지겁 마시게 되었어
세 사람은 파커의 피로 목을 축인 후 살을 발라 날것으로 먹었고 남은 살점은 햇볕에 말렸어
작은 보트 안은 피와 살점들로 난자했지
위 사진의 통통배가 실제로 1884년 미뇨넷호 선원들이 탔던 구명보트야
그로부터 4일이 지났고 남은 고기는 거의 부패한데다 피는 상해버렸다
또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해진 순간 기적적으로 그들 눈앞에 독일 배 한 척이 나타나
그들은 다행히 구조되었고 2주간을 먹고 자기만 했다고 해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더들리 선장은 독일인 선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털어놓았다
더들리는 동료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
한 명을 희생해 나머지 3명을 살렸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구조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미뇨넷호 생존자들은 본국인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고 그들은 분노했지
선장이었던 더들리 입장에서는 선원 대부분을 살렸기 때문에 체포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봤는데
영국 정부는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라고 규정지었어
당시 영토를 확장 중이던 대영 제국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이라 구원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거든
그에 대한 증거로 원주민들이 식인을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영국 선원이 식인을 했다는 사실은 정부 입장에선 영토 확장에 문젯거리가 되었던 셈이지
영국 정부는 선원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선례로 삼으려고
그들을 기소하기 위해 검찰은 살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브룩스를 검찰 측 증인으로 세워
브룩스는 증인을 해주고 기소를 면할 수 있었지만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살인죄로 법정에 선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선원들의 편이었지
1884년 11월 배심원들은 더들리와 스티븐스에게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무죄를 결정해
하지만 판사는 이를 무효화시키고 특별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압력을 행사해
결국 재판에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유죄를 선고받은 더들리는 이런 말을 한다
" 이것으로 선원들의 관습을 금지시킨 줄 알겠지만 진실을 감추게 됐을 뿐이다.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관습을 따르되, 구조된 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선원들의 관습에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영국 정부는 수감 6개월 만에 두 사람을 석방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그 트라우마로 다신 배를 타지 못했고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 조난사고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루과이 공군의 쌍발 터보 프로펠러기인 페어차일드 FH-227D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스텔라 마리스 대학의 럭비 선수단을 싣고
칠레의 산티아고를 향해 안데스산맥을 거치는 항로를 비행하고 있었다
페어차일드는 칼라스코 국제공항에서 출발했지만 산맥 상공의 날씨로 인해
아르헨티나 멘도사 부근에 비상착륙을 감행했다
추락 후 동체만 남은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하 40도의 극한 환경에서 72일간을 생존해야 했다
사고 당시 사망 12명 행불 5명으로 생존자는 총 28명이었지
구조대가 오길 기다렸지만 정작 구조대는 2주간의 수색 동안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들이 죽었다고 단정 짓는다
이틀 후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찾는 구조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목격한다
그중 한 비행기가 좌우로 흔들어대며 생존자를 찾고 있는데
이걸 목격한 생존자들은 구조대가 자기들을 봤다가 착각을 하지
결국 생존자 중 하나가 구조대가 곧 올 거라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식량 대부분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구조대는 오지 않았어
수색대를 만들어 비행기 잔해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찾았지만 그들이 모두 먹기엔 부족했지
그러던 중 탑승객이었던 의사 두 명이 식인을 하자고 주장해
생존을 위해서는 단백질이 필요하고 최고의 단백질은 자신들이 매장한 시체로 섭취할 수 있다고 말이지
탑승한 럭비팀의 이름이 'Old Christians'이었던 만큼 탑승객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들이었어
이들은 계기판에 몸이 끼어서 고통받으며 죽어가던 조종사가 권총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종교적 신념으로 거절했던 아주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거기다 이들이 꺼내 먹어야 했을 시체들은 다름 아닌 친구, 형제, 부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의사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내 몸도 먹어도 좋다,
죽은 가족도 자신들이 살길 바랄 거라고 설득하여 그들은 결국 시체에 손을 대지
고기를 배불리 먹고 영양을 섭취한 사람들은
구조대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건장한 몇몇 생존자를 뽑아 안데스를 넘어 칠레로 구조 요청을 보내기로 한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재차 시도하여 결국 칠레 진입에 성공해
다행히 한 농부를 발견하여 구조 요청을 하고 나머지 생존자들도 결국 구조되는데 성공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16명의 생존자들
이외에도 생존을 위해 식인을 했던 사례는 많지만 이 정도만 소개하겠다
위들의 예시에서 보듯이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건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당할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만 현대사회에서의 법은 "무죄" 다
대표적 예시로 '카르네아데스의 판자'가 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에서 배가 난파되어 승무원 전원이 바다에 빠졌다.
혼자만이 매달릴 수 있는 널빤지 한 조각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나 그 판자에 매달리려고 했다.
매달려 있던 사람은 두 사람이 매달릴 경우 널빤지가 가라앉아 둘 다 죽게 된다고 판단하고
그 사람을 밀어내 빠져 죽게 만들었다.
이후 그는 구조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른바 "긴급피난" 이라 말하며 정당방위와는 다르다
정당방위는 위법한 침해를 전제로 하고, 방위행위는 직접적인 침해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부정 대 정의 관계로 표현되지만, 긴급피난은 위난의 원인의 위법, 적법을 불문하고,
피난 행위도 위난을 야기한 자뿐만 아니라 이와 무관한 제삼자에게도 가능하기 때문에 정 대 정의 관계로 표현된다.
한마디로 법에서도 긴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는 것은 용인해준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위에 소개됐던 식인 행위에서 그들이 비인간적이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 상황에서 나 또한 식인을 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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