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히치하이커 살인마 연쇄살인범 도널드 헨리 개스킨스를 알아보자

2020. 8. 10. 19:11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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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위"라는 별명을 가진 도널드 헨리 개스킨스
그는 아주 작은 키를 가진 탓에 작은 사람이란 뜻을 가진 "피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성인이 됐을때 그의 키는 고작 158cm밖에 안됐다.

개스킨스는 1933년 3월 1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플로렌스 카운티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매일 바뀌는 어머니의 애인들로부터 학대를 당해오며 자랐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를 돌보지도 않고 방치해뒀다.

학교에 들어간 개스킨스는 또래들보다 왜소한 체구탓에 동급생들한테 "피위" 라고 놀림받았다.


하지만 작은체구에도 불구하고 강단이 있어서 가만히 있지않고 항상 싸웠다.

그러다 그는 열한살때 학교를 그만두고 동네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도널드는 일하는 곳에서 또래의 소년 대니와 마쉬를 만나게 되었고 같이 절도와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대니의 열한살짜리 동생을 방으로 끌고가 오후 내내 강간하다가 부모에게 발각되고
그들은 발목이 묶여 매달린채 발목과 성기를 피가 날때까지 맞았다.


이후 대니와 마쉬는 마을을 떠나 다른곳으로 사라졌지만 개스킨스는 마을에 머물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1946년 어느날 개스킨스는 한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그집에 사는 소녀에게 발각되자 소녀에게 도끼를 휘둘러 중상을 입히고 도망쳤다.


하지만 소녀는 살아남아 개스킨스가 범인이라는 증언을 했고 그는 체포되어 소년원으로 보내졌다.


소년원에 수감된 그는 작은 체구로 인해 다른 죄수들의 재밌는 장난감이 되었다.


그는 매일마다 다른 죄수들에게 똥꼬를 개통당했으며 간수들로부턴 구타를 당했다.


그는 소년원을 겨우 탈출해 13세 소녀와 결혼을 했고

무슨 바람인지 경찰에 자수에 남은 형기를 모두 마치고 18살때 출소했다.



석방된 개스킨스는 담배농장에 취업하여 잠시 일했는데 그곳에서 담배를 훔치고 헛간에 불을 질러 도둑질을 덮기도 했다.

1953년 그는 10대 소녀가 자신의 키와 외모를 비웃은거에 대해 분노하여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개스킨스는 교도소에서 가장 악명높은 죄수인 헤이즐 브라젤의 먹잇감이 되어 상습적으로 구타와 강간을 당했다.


 그는 괴롭힘에서 벗어날려면 자신이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헤이즐 브라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결국 가장 악명높은 죄수인 헤이즐 브라젤의 목을 베 살해하여 그가 원하던 권력자가 되었다.


 죄수들은 그를 더 이상 만만하게 보지 못하고 존경을 표했다. 그 일로 그는 징역 3년을 추가로 살다 나왔다.

1962년 개스킨스는 12살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6년동안 수감됐다가 1968년 11월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풀려났을때 그는 강간으로 더 이상 감옥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희생자들을 죽여서 입막음 하는것이었다.

[연쇄살인]

개스킨스는 6주에 한번꼴로 살인을 저질렀으며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고속도로에서 남녀 80~90명을 살해한걸로 추정된다.

개스킨스는 희생자들을 최대한 오래살리는 방법으로 몇일간 고문을 하다가 칼로 찌르거나 절단하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심지어 그는 식인행위까지 저질렀으며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절단된 부위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으며 그것을 그들에게 먹이기까지 헀다.

개스킨스의 첫 번째 희생자는 히치하이커였다.




1969년 9월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어린 소녀를 태우게 된다.

그는 소녀에게 성관계를 제안했지만 소녀가 그를 거부하자 기분이 상한 그는

소녀를 구타하고 강간한뒤 고문해 죽이고 시신을 늪에 던져 유기했다.



1970년 11월 그는 자신의 조카 15살 재니스 커비와 그녀의 친구 17살 패트리샤 앤 앨스브룩에게

집까지 태워준다고 말한뒤 그들을 폐가로 끌고가 강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물에 빠트려 살해했다.



1973년 그는 자신의 지인인 23살 도린 뎀프시에게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준다며 그녀와 딸을 차에 태웠다.


그녀는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었으며 20개월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도린 뎀프시와 그녀의 딸 로빈 뎀프시

그는 그들을 인적이 드문 숲으로 데려간뒤 그녀를 강간하고 죽이고 그녀의 아기 마저 강간하고 살해했다.


그는 유아를 강간하는것이 인생 최고의 성경험이라고 말했다.

1975년 개스킨스는 고속도로에서 고장난 밴때문에 정차해있는 세명을 살해하였고 

밴을 처리하기 위해 친구인 월터 닐리한테 밴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개스킨스는 스스로의 살인욕구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청부살인을 받기도 했다.


같은해 수잔 키퍼라는 여성이 그에게 자신의 전 남자친구인 부유한 농장주 사일러스 예이츠를 죽여달라고 청부했다. 

1975년 2월 12일 개스킨스는 그를 밖으로 꾀어내 살해하였고 시신을 처리했다.


이 살인사건에 세명이 연루 되어있었는데 그를 농장밖으로 불러낸 다이앤과 정보를 제공했던 두명의 남성들이었다.

살인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다이앤과 그녀의 남자친구는

개스킨스에게 잡혀가기 싫으면 오천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연쇄살인마인 그에겐 얄짤없었다.

그들은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

이후 그는 성관계를 거부한 13세 소녀 킴 겔킨스를 고문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살해하느라 정신 없었다.
그가 정신없는 와중 두명의 남자가 그의 정비소에서 도둑질을 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둘을 죽였고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월터 닐리를 다시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체포와 재판]



그렇게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던 개스킨스는 1975년 11월 14일 체포된다.
당시 경찰은 킴 겔킨스 실종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고 용의선상에 오른 개스킨스의 집을 수색하러 갔다가 킴 겔킨스의 옷을 발견하게 됐다.


조지아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집에 경찰들이 들끓는것을 보고 황급히 버스정류장으로 도망쳤지만 버스가 오기도 전에 경찰관들에게 체포됐다.

경찰은 개스킨스와 함께 다니던 공범인 월터 닐리를 체포해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압박감에 못이겨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이 묻힌 묘지로 경찰들을 데려갔다.




경찰들은 그곳을 파내었고 그곳에서 시신 8구를 찾아냈다.

1976년 5월 28일 그는 8건의 살인혐의를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같은해 대법원에서 사형을 위헌으로 판결하여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그는 감옥안에서 잔혹한 연쇄살인마로서의 악명을 즐겼다.

그 즐거움도 얼마 못가 1978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사형제가 다시 합법화 됐다.



노부부 살해범 루돌프 타이너

수감중이던 개스킨스는 노부부 살해범인 루돌프 타이너를 살해해달라는 의뢰를 노부부의 아들로부터 받는다.
개스킨스는 독살 등 여러방법으로 타이너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개스킨스는 그가 독방에서 심심하지 않도록 휴대용 라디오를 빌려주겠다며 라디오를 건내줬다.


그 라디오에는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가 라디오 버튼을 누르자마자 폭발해 그의 머리 절반이 날라가버렸다.

개스킨스는 루돌프 타이너 살해혐의를 유죄 판결을 받아 또 다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형을 피하기 위해 100건의 살인을 자백했지만 일부 살인사건은 이미 범인이 잡혀있는 상태였으며 다른 살인사건도 입증되지 않았다.




사협집행 당일날 그는 사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잘라냈지만

잘라낸 손목은 다시 봉합되었고 예정대로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1991년 9월 6일 새벽 1시 5분 개스킨스는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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