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모 아동방치사건을 알아보자
2020. 4. 22. 18:59ㆍ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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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도쿄 도시마구 니시스가모 에서
일어난 아동방치 사건으로,
통칭 스가모 아동방치사건 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1988년 7월 18일,
도쿄 도시마구 스가모의 한 맨션에서
"동거자인 엄마가
아이 3명을 놔두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는 내용의 제보가 경찰에 접수되어
경찰 및 아동복지사를
대동하여 해당 맨션을 방문한 결과,
제보자의 증언대로
아이 3명이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어.
방 안에는 잔반이 썩은 악취로 가득하고,
당시 14세의 장남, 각각 6살, 3살짜리 여동생은
장기간에 걸친 영양 실조로 인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어.
화장실 근처에는
대변이 말라붙어 있었고,
제대로 청소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는 상황으로 볼 때 아이들의
방치가 상당히 오래된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지.
이에 쇠약하기는 하지만
걸을 수 있었던
장남을 제외하고 나머지 2명의 여동생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어.
후에 뉴스를 보고
"어, 이거 혹시 우리 집 아닌가" 하고
돌아온 아이들의 어머니에 의하면
자신의 아이는 총
4명으로 장남 아래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고 해.
그럼 도대체 1명의 여자 아이는
어디론 간 것이며,
어머니는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아이들을 방치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었지.
아이들의 어머니는 1973년,
26세에 장남을 낳았으며,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지만
이뤄지지 않은 채 남성들과의
연애에 몰두했고,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변변한 남자들이 아니었어.
1979년 장남이 6살이 되었음에도
취학통지서가
날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어머니는 물론이고 장남의
아버지까지
"구청에 한 번 가서 해결하면 된다" 는
생각만 가지고 장남을 그대로 방치했어.
사실, 부모 모두 구청에
장남의 출생신고는 물론이고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81년,
두 번째 여자 아이를 자택에서 출산했으며
당연히 이 아이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음.
여담이지만 아 여자가 낳은 아이들은
다 제각각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세 번째 남자 아이를 출산했지.
여기까지 읽은 자둥이들은
"어? 장남 1명, 여자아이 3명인데
왠 남자 아이가 하나 툭 튀어나오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아이는 3년 후
어머니가 우유를 먹이던 중
질식사하고 만다.
이 죽은 아이의 처리를 곤란해 하던
어머니는 아이의 시체를 적당히
비닐 봉투에 넣어 집 안에 유기했고,
후에 백골로 변한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지.
이후 1985년에 한 명,
1986년에 한 명,
이렇게 죽은 아이를 제외하고
총원 4명의 각각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마치 신형 스마트 폰 발표하듯
뽑아낸 거지.
이쯤되니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지쳐버린
어머니는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애인과 동거할 생각을 했어.
1987년 가을,
그 때까지 어머니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항상 동생을 돌보던 장남에게
갑자기 현금으로 몇 만엔 정도를 쥐어주며
자신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어.
당연히 아직 어렸던 장남은 울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렸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되는 거니?"
(お母さんは幸せになっちゃいけないの?)
사실 아이를 버리고 얻는
어머니의 행복 따위 존재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그래도 장남은 막아서지 못하고
그대로 어머니의 가출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1년에 가까운
아이들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지.
장남은 주어진 돈을 아껴서
근처 슈퍼에서
도시락이나 삼각 김밥을
사다 먹이며 열심히 돌보았어.
그러나 일을 해서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장남으로서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꾸려가는
살림 살이가 너무나도 가혹했지.
그렇게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동네에 물건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3명 정도 친구가 생겼고,
취학통지서도 날아오지 않아
학교를 가지 못한 장남에게는
이 소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이야.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너 학교는 어디 다니니?" 라고 물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배운대로
"릿쿄소학교" 에 다닌다고 둘러댔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해.
장남은 그렇게 하루하루
괴로운 살림살이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를 가지게 되었지.
물론 점점 생활비는 떨어져가고,
세 여동생들은 건강상태가
악회되어 가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저 집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어.
1988년 4월,
친구 두 명을 집으로 불러들인 장남은
자신이 먹으려고 남겨둔
컵라면이 사리진 것을 알고
동생들에게 캐물었지만
둘 째 여동생이 입가에
라면 부스러기를 묻히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혼을 냈어.
둘 째 여동생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당시 2살 이었던 막내 여동생이
울음을 터트리며 오줌을 싸자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한다.
장남은 벌을 준다며
막내 여동생을 이불에 싸서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행동을 반복했어.
나중에는 같이 놀러온 소년들에게도
"너희도 해봐, 재미있어." 라고 권유했으나 거절,
결국 2살짜리 여동생이 버티기에는
지나친 충격이 지속적으로
가해지자 결국 두부외상(頭部外傷)
에 의해 사망하고 말았지.
놀란 장남과 소년들이 마사지를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등
나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으나
이미 죽은 여동생을 살릴 수는 없었고,
약 일주일 정도 지나 부패하기 시작하자
여동생의 시체를 사이타마(埼玉) 현에 있는
히쯔지야마 공원(羊山公園) 근처 숲에
유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남은 자기 손으로
2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죽이고,
남은 두 여동생과
하루하루 굶주림을 견디며
생활하게 된 거지.
결국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맨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되어
바로 신고했고,
결국 아이 어머니는 뉴스를 보고서야
자기 집 아이들인 것을 알고 돌아가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아이들이 출생신고도 안되어 있었던 탓에,
집에서 발견된 차남의 백골 시신과
숲에서 발견된 막내 여동생의 시신은
출생일과 사망일이 동시에 신고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1988년 8월 10일,
도쿄 지검에서는 14살인 장남을 상해치사,
사체유기로 도쿄 가정법원에 송치됐다.
단, "모친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며,
장남은 교육적처치가 필요"
하다는 의견을 첨부하여 보호시설로
보내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지.
일본의 검사들이 기소가
불가능할 것 같은 사건에는
그다지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는
관례를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한편 어머니 쪽은 "보호자 책임 유기법"
위반으로 송치되었지.
결국 10월 26일,
어머니에 대해서는
"자기 아이를 양육하는 번거로움에서
도피하려한 무책임,
자기 위주의 극치인 범행,
3녀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월을 선고했어.
이런 중대한 사건의 원인이 된
범행의 결과 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운 처벌이었지.
장남은 모든 정황을 참작,
보호시설로 보내라는 법원의 명령이 떨어졌어.
결국 이 사건은 2004년에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손에 의해
"아무도 모른다" 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어.
참고로 이 감독이 배두나가
출연한 영화 "공기인형" 의 그 감독이지.
실제 사건과는 달리 비교적
따뜻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는데,
감독의 성향이 워낙 그런 쪽인지라
감성이 충만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57회 칸느 영화제에서
일본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훗날 어머니가
아이 둘을 방치해 죽이고
풍속업소에서 일하다가 이슈화된
오사카 아동유기사건에 비하면
다소 지명도가 낮은 사건이었지만,
아이들이 거의 1년 가까이
어른들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살아가게
방치하고 결국 한 아이의 생명까지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 참혹한 결과를 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란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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