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14:08ㆍ정보
간첩 손성모
손성모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서울대에 입학한 후 6.25전쟁 발발 후
인민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했다가
월북함.
손성모는 1970년대 후반 전남 해안에
공작원으로써 몰래 잡입하여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로 위장 활동하다가
1981년 23월에 경북 문경에서 체포됨.
1988년 대법원에서 간첩활동으로 판결받고
수감 중 김대중 재임 시절 특별사면시킨 후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송됨.
위키백과 - 손성모
간첩이나 국내 반체제 사범들을
전향선언이나 준법서약없이
모두 풀어주라는 한겨례21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222/1p8m2m01.html
광주 증심사
광주 증심사는 1980년대 당시
반역자들의 소굴이자 봉기의 거점이었고,
학동은 봉기 확산의 중심지였음.
손성모가 있던 무등산에서
봉화불 신호가 있자 학동파출소
그리고 금남로 일대의 MBC 방송국과
세무서 및 우체국 등에 일제히 방화가 시작됨.
5.18간첩 손성모, 증심사, 광주운동권과
빨치산
(출처 : 만토스라는 논객이 시스템클럽 자유게시판에 쓴 칼럼)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11335&sca=&sfl=wr_name%2C1&stx=%B8%B8%C5%E4%BD%BA&sop=and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방송국과 관공서를 습격해서
방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당시 가톨릭농민회 전남회장이었던
서경원은 5월 19일에 광주 북동성당에서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려고 계획하는 동시에
전남대총학생회에 학생동원을 요청했다.
이 때 그들은 "죽창과 밧데리를 준비해서
방송국, 공공건물,
예비군 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는
충격적인 논의를 한다.
(전남대총학생회 기획실의 비밀문건인 [자유])
방화로 인하여 전소된 광주 MBC 방송국
방화로 인하여 전소된 광주 세무서
-광주에 침투한 한 북한 특수요원의 증언-
길지만 읽어 볼 가치가 있는 글이다
출처 : 시스템클럽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5033
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6년만에 입 열다(전문)
아래 글은 16세에 북한군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특수기술만 훈련하면서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19세 때 지휘관 호위병으로 5.18광주에 왔던 이야기를 또 다른 탈북자의 필력을 빌어 남한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첫 번째 증언이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데 대해 이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 광주 주변 산에 있으면서 고첩들이 가져다 준 빵과 고등어 반찬의 맛이 황홀했다고 한다.
글을 배울 나이에 인간기계로 훈련됐기에 그는 스스로 글을 쓸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다 노무현 시절(2006)의 국정원이 ‘광주에 왔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는 협박을 원체 강력하게 받았고, ‘광주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보안각서’까지 썼기에, 우리는 지난 6년동안 ‘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이 분당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했지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마침 같은 함경도로부터 탈북한 의협심 있고 필력 있는 탈북자 이원명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명 김명국의 ‘광주참전기’를 꼼꼼하게 챙겨 세상에 내놓았다. (생략) 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이 인터뷰 전문은 금년 3월 22일 작성된 것이지만 필자(지만원)는 4개월 후인 7월 20일에야 획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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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사태에
남파 되었던
북한군 특전사의 증언
글쓴이: 이원명(탈북자)
구술인: 김명국
(가명, 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2012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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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이원명)의 머리말
1980년 5월 광주 사태현장에
파견 되었던 전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연락소(남파 간첩 훈련소)
전투원을 인터뷰 하다.
(생략)
필자는 그 당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북한 인민군으로 광주사태현장에 침투하였던 당사자를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애를 써 왔다.
(생략)
이 글을 본명의 이름으로 내지 못한다는 사죄의 말씀드린다 한 것은 북한 김정일이 자신의 범죄 행적과 북한 정권의 반인륜적인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애국적이며 양심적인 탈북민들에 대하여 보복행위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 있는 탈북민들은 다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의 이름을 알면 북한에 있는 남한 탈북민들의 가족과 친척들을 찾아내어 처형하곤 한다. 이런 파쑈적인 범죄행위를 거리 낌 없이 감행함으로 죄스러우나 본명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필자는 밝히는 바이다.
5.18 광주 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이다.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을 쓰기로 한다.
그이(김명국)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 ○○○리 이다. 대한민국에는 2006년 7월에 입국하였다. 광주 사태참가자 본 당사자와의 인터뷰는 본인(이원명)이 그의 집에 찾아가 하였다. 그의 집은 서울 지하철로 1시간 30분가량 가는 성남 분당의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그는 북한회령에서 나와 한 고장 사람임으로 이미 전에 친분 관계가 두터웠다. 필자가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5.18 광주사태에 참가한 사실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5.18 광주사태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중앙당 연락소 성원으로 남한에 침투하여 북한군 특수작전에 참가하였던 당사자와 인터뷰 한 내용을 아래에 그대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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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북한군 특전사로
파견되어 활동한 김명국의 증언
한반도의 정치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5.18광주사태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한국이라고 하는 이 나라 정치사가 얼마나 어지러운가를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나는 북한군 특전사로 1980년 8월 광주사태에 남파되었던 사람으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실지 사실을 인터뷰를 통하여 밝히려 한다.
5.18 광주사태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기만하며 진실을 오도 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남한의 일부 정치 세력의 불순한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플 뿐이다.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의 전투명령을 받고 중앙당연락소(남파 간첩훈련소) 전투원으로 남한에 침투되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던 남한 해방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사태의 참가자인 나의 증언이 잘못된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잡는데 도움 되기 바랄 뿐이다.
(생략)
질문: “한국에 와서 한번도 5.18 광주사태 당시 남한에 형님이 내려 왔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말 한 적이 없어요?
대답: 동생도 잘 알겠지만 북에서 온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하면 대성공사에서 조사를 하지 않나. 이미 전에 여동생들이 한국에 먼저 오면서 대성공사 조사과정에 내가 5.18광주 사건 당시 남한테 북한대남 연락소 전투원으로 내려 왔었다는 것을 말했더구나. 대성공사에서 그에 대해 물어 보길래 내가 남한에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했지. 내가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는 말이 나면 남한 사회가 복잡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공개하지 말 것을 부탁했댔어.
그런데 보라. 남한에서 좌파들이 마치 자기들이 남한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 것처럼 떠들고 광주봉기를 민주화운동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북한하고 손잡고 정부전복을 꾀한 사람들이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데 이거야 완전한 날조가 아니고 뭐야. 그래 보다 못해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서 동생한테 이야기 하는 거야.
질문: 광주 사건에 앞서 명국형님이 북한인민군의 어떤 부대에서 복무하였는지부터 간단한 이력을 이야기 하여 주세요.
대답: “고등중학교16살 때 중앙당 5과에 가는 사람들 신체검사한다면서 청진 도당 청사객실에서 1977년 8월 24일 신체검사와 최종담화를 중앙당에서 내려온 사람들하고 하였어. 나는 중앙당 5과에 간다는 것을 그때 그 사람들이 말을 하여서 알았다. 77년 8월 26일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중앙당 대남 연락소에 입대하였어.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이야. 순안구역 구서리 라는 곳은 평성과 순안구역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어. 112훈련소의 위치를 보면 산세가 험하고 앞뒤 옆이 다 산으로 들러 막혀있는 곳이야. 우리 훈련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자모산’ 이라는 곳이 있는데 김일성의 별장이 있다는 것을 후에 알았어.
질문: 훈련소에서 훈련은 어떤 훈련을 많이 받았어요?
대답: “우리는 단위로 구성되었는데 한 개 조가 10명씩이었는데 여자들도 배속되어 훈련을 함께 받았어. 주로 격술, 운전기재 다루는 법(땅 위에서 굴러가는 것은 다 배웠어), 산악훈련, 각종무기 다루는 법(비행기, 헬리콥터, 전차, 장갑차와 저격무기들) 특히 적군 무기 다루는 법을 많이 하였다. 낙하훈련을 많이 하였는데 낙하하면서 대원들이 다리를 많이 다치곤 하였다.
질문: 그 때 훈련을 함께 받으면서 아는 조원들 이름 기억나면 말씀해 주세요?
대답: 우린 규정상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어 있어. 번호를 부르게 되어 있다. 예로들면 153번이라고 하면 1은 훈련소 번호이고 5는 타격조 번호이며 3은 본인 번호이다. 다른 조 대원들하고는 절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훈련소에 미국제 지프차가 60대 정도 있었는데 운전기재 훈련할 때는 주로 구서리 강기슭에서 하였다. 내가 우리 조에서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조장 이름이야. 조장이 여자였는데 이름이 홍인옥이고 고향은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군)랬어. 그때 나이가 16살이었는데 7살 때부터 훈련소에 입대하여 중학교 교육과정을 함께 받았다 그래더군. 아버지, 어머니 없는 고아라고 했어. 대남 연락소 아동훈련소에는 주로 고아들이 많이 있었다.
질문: 아동훈련소는 사명이 무엇이에요?
대답: 한마디로 말하면 중앙당 연락소 후보지나 같다고 봐야 한다. 중앙당 연락소라는 곳이 너도 알다시피 남한이나 해외에 간첩들을 파견하는 곳이 아니야. 아동훈련소는 개성연락소, 원산연락소, 해주연락소, 청진연락소 등에서 인원이 요구되면 보충하는 곳이라고 보면 정확할 게다. 어떤 때는 지도와 나침반만 주면서 야밤에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죽은 사람 묘를 파고 그 안의 시체에서 쪽지 같은 것을 찾아오라고 시킬 때는 등골이 오싹하지 뭐.
질문: 기차 같은 것은 몰아 보셨어요?
대답: 전기 기관차, 증기 기관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훈련 할 때는 개천에서 순천으로 다니는 증기 기관차와 전기 기관차를 잡아타고 탈출하는 훈련을 했었다. 그렇게 1년 넘게 훈련을 받다가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조선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일명 대남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배치되었다.
질문: 중앙당 연락소 2처 전투정찰은 무엇을 하는 부대요?
대답: 부대 명칭은 조선인민군1010군부대야. 왜 1010군부대라고 부대이름을 달았는가하면 조선노동당창건 날짜를 따서 부대 이름을 그렇게 불렀어. 북한에 대남 연락소가 몇 개 되는데 1010군부대는 중앙당 직속 연락소야. 1010군부대는 전투정찰과 여성타격대(목란 꽃 중대)가 있었다.
질문: 중앙당 연락소에 1처와 2처가 있다고 했는데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대답: “내가 배속된 2처 전투정찰은 1처의 전투 진입을 보장해주고 신변호위를 담당해주는 것이 기본 임무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1처 사람들이 남한 목적지까지 호위 사업을 맡아 데려다주고 임무를 마치고 북으로 들어오는 1처 사람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1처는 남한에 침투하여 한국 국적을 가지고 국가의 중요 직책들에 잠입해 있으면서 각종 기밀자료들을 수집하고 남한의 반정부 음모 활동을 벌리는 첩자들을 파견하는 기관이야. 여성들은 주로 남파되어 남조선의 정부요인이라든가 군부 장성 급들, 민주주의 인사들, 기업가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그들을 북한 쪽으로 돌려 세우는 사업과 외국에 전투정찰은 임무가 서로 다르다. 예로하면 육상 조와 해상 조로 나뉘어 1처의 전투임무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1977년 가을 남한 이리역 폭파사건이 우리 연락소에서 조직한 거야. 이리역 폭파 사건 때 3개 조가 파견 되었는데 우리 조장(이름 리상국)의 조만 살아남고 나머지 2개조는 폭약 실은 열차 다이야가 터지면서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하여 죽었다고 조장이 말하더라.
질문: 5.18광주 사건 때 북한에서 임무를 어떻게 받고 나왔는지 설명 좀 해주세요.
대답: 1980년 5월 18일 날 야외 훈련하였는데 다 철수하라고 해서 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5월 19일 날 조장, 부조장들이 오전에 어디 갔다 오후에 돌아 왔는데 훈련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준비를 하라는 거야. 훈련장구류라는 것이 총탄300발, 수류탄2발, 권총과 카빈총1정, 단도, 포승 끈, 구급치료 약 이었다. 식량은 미시가루 6일분, 말린건. 쌀 3일분(물에 타서 먹을 수 있게 준비된 것), 영양알약1달 분치를 준비하여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등산용 배낭에 넣었다.
피복은 조장이 물자 창고에 가서 타온 것을 입었다. 위에는 잠바형식(색상은 여러 가지), 바지는 미색으로 된 것이고 신발은 남한 운동화 같은 신을 신었다. 그 날 오후 4시 경에 대양리에서 50명의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 지프차로 출발하였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19살 때이다. 부대에서 내가 제일 어리니까 우리 조장이랑 나보고 다 ‘막둥이, 막둥이’ 해댔어.
질문: 그날 떠날 때 조장이라든가 다른 지휘관들이 남한이나 어디에 간다는 말 한 것 없어요?
대답: 전혀 남한에 온다는 것을 몰랐어. 부대 규정상 우린 어디 훈련 나간다고 하면 조장이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되는 거야. 절대 알려 주지 않아.
질문: 5.18광주 사건 때 남한에 침투된 북한군의 인원 수를 알고 있어요?”
대답: 훗날 총화 때 알았는데 200명 정도 나왔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 온 사람이 17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파견대장이 말하더라. 우리 파견대 대장 이름이 ‘문제심’이야. 현재 ‘문제심’은 북한 인민군 무력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어 일 하고 있어. 1분견대, 2분견대하고 대장 직속 부대가 있었는데 우리조가 직속부대에서 대장의 호위를 맡았댔어. 1개 분견대 안에 2개 타격대와 직속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한에 들어가서 총화 끝에 분견대장들은 교도지도국 작전국에 소환(출세)되어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개 타격대가 50명씩이니까, 4개 타격대에다 직속부대까지 합하여 남한에 나온 인원수가 200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질문: 그럼 남한으로 떠날 때 200명이 함께 떠났어요?
대답: 아니야,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2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후에 조장이랑 지휘관들이 말하는 것 들으려니까 우리 먼저 남한에 침투된 상태인 것으로 말하더라. 우리 조는 12명이랬어.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우리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들이었다.
질문: 조장이랑 조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말해주세요?
대답: 우리 조장이름이 ‘리상국‘ 이었는데 나이는 23살이고 고향은 함경남도, 함주군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때 함주군 인민병원 초급당 비서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군사칭호는 중위였어. 날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우리 부조장의 이름은 ‘한광호’인데 나이는 22살이고 군사칭호는 소위였다. 고향은 어디라고 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조 성원들의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은 ‘김일룡’(21), ‘최길산’(20), ‘황보석’(21), ‘한철수’(21)인데 훈련 나가게 되면 나랑 항상 같이 숙식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나지. 다른 애들은 30년 전의 일이니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그 때 나는 군사 칭호가 상사였어.”
질문: 남한으로 침투하던 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대답: 5월 19일 오후 4시경에 대양리에서 갱생 트럭 6대에 직속 부대 50명 인원이 나누어 타고 떠났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내가 그때 듣기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바닷가 인데 어슬 어슬 한때니까 아마도 저녁9시 경이 된 것 같더라. 바다 쪽으로 보니까 부두에 배가 2척이 있더라.
대장이 조별로 배에 오르라면서 오르는 순서대로 갑판 밑에 다 내려가라고 지시해서 모두 갑판 밑에 내려갔다. 복도가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침실처럼 되어 있더라.
조장들이 먼저 침실 점검을 하고 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군복을 벗고 각자에게 있는 사민 복을 입으시오! 라는 것 이었다. 조장은 조 성원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는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져 바다에 뛰어 들어 보니 물이 가슴높이 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30m 정도 되게 기슭으로 바다 물을 가르며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무인 지경 같아 보였어. 그날이 21일 새벽 2시경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가 배를 타서 2일간 바다에 있던 것이다.
질문: 남한에 내려오면서 탔던 배가 어떤 배였는지 좀 말해주세요?
대답: 우리가 탔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었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어 있어. 하루 종일 갑판 밑에서 있으려니까 낮이 가는지 밤이 가는지 모르겠더라.
질문: 그 때 바닷가에 내렸을 때 인상적이라든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대답: 캄캄하니까 잘 모르겠던데 바다 주변에 울퉁, 불퉁한 바위가 많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나. 바다 주변에서 올라와 2명~3명씩 2시간 정도 은폐해 있었는데 대장이 조장들을 부르더란 말이야. 그 때 나는 대장 호위를 맡았으니까 대장 옆에 얼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알 수 있었는데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하는 것 같더라. 그 들의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남한 쪽에서 마중 나온 길 안내자들인 것 같아.
한참 대장이랑 조장들이랑 무슨 토의를 하는지 있다가 조장이 우리한테 와서 ‘모여, 이제부터 조원들은 전투행동으로 넘어간다, 여기는 남조선이니 우리가 목표물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조심히 행군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투행동이라고 할 때는 북한에서 강습 받기는 행군도중 노상에서 만나는 그 누구라도 없애 버리게 되어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조건 처리해버리라(죽여서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 지휘부의 명령이다. 행적이 밀고 될까봐 그러는 거야. 그때야 내가 남조선이라는데 왔다는 것을 알았어. 조장이 남조선에 왔다니까 갑자기 긴장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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